혐) 광주 학살 당시 계엄군의 행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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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들에게 해산을 명령하며 폭동적 시위진압을 실시하는 진압군들
1980년 5월 18일 오후 4시 경 반란군의 불법적인 정권 탈취를 반대하는 시위대의 가두행진을 해산시키기 위해서 진압군들이 광주로 진입하였다
그들은 세겹으로 횡렬을 지어 도청쪽으로 향하며 다가왔고, 지휘관은 "제자리에 서, 정렬"이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횡단보도에서 그대로 멈춰서 대오를 가다듬고 대기했다
유동 삼거리에서 몇 미터 떨어진 횡단보도였고, 북동 180번지와 루문동 62번지를 연결하는 광주제일고등학교 교문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후 대열을 따라온 초록색 탑차량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큰 소리가 울려퍼졌다
"거리에 나와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
이때 시위대와 거리의 시민들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지휘관은 다른 명령을 하달했다
"거리에 나와있는 새끼들 전부 다 체포해"
(출처 -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김영택, 1996, 35쪽)
이 명령 외에는 다른 명령이나 자세한 지침서 따위는 없었다
주동자 체포, 시위 해산같은 것이 아닌 거리에 나와있는 자들을 모두 체포하는 것이라면 노인, 아이, 장애인 할 것 없이 군인들이 '재량껏' 체포할 수 있었다
그렇게 광주에서 학살이 시작되었다
▲국민을 수호할 의무가 있는 군인들이 국민들에게 얼차려를 시키고 있다
젊은 처녀나 양복을 입은 반반한 청년들에 대한 진압군의 폭행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젊은 청년이 계엄군에 발각되면 워커발로 짓이기고 몽둥이 찜질을 한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청년들이 도망이라도 치면 끝까지 추적한다. 그리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더 이상 운신하지 못하도록 끝까지 폭행을 가한다
내가 목격한 장면 중 한 청년은 금남로 중간에서 계엄군에게 붙들려 얻어맞다가 옆 골목으로 도주해 무등고시학원 안으로 들어갔는데
뒤쫓던 계엄군은 무장한 채로 계단에 들어가기 번거로우니까 소총에 장착된 대검을 뽑아 청년의 등에 던졌다
이어 합류한 계엄군은 무장한 채로 학원에서 공부중이던 수험생들에게 향했다
-김충근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금난로 아리랑, 5.18 특파원, 212
진압군은 광주제일고교까지 들이닥쳤는데 이곳은 과거 일본제국의 악랄한 순사들조차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장소였다
일제의 악랄한 압제에 대항한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순사들마저도 교직원들에게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한 뒤 주동자만 체포하고 조용히 나섰던 곳이었다
그런데 진압군은 군화를 신고 시위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교사와 수업 중이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진압군은 당시 (5월 18일 일요일) 주말 학교를 다니던 중장년층에게도 폭행을 가했는데 그들 중 일부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참전용사들이자 진압군들에게는 군선배도 있었다
▲광주 학살의 상징적인 장면이 된 사진 속 의무병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병과임에도 자국 국민을 살해하기 위해서 몽둥이를 들었다
▲'불온한 폭도'의 체포가 아닌 인간사냥을 위해 착검한 소총을 든 진압군은 더이상 '국군'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압군의 폭력은 잠잠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더 잔인해져갔다
폭도를 체포하고 시위를 진압한다는 과제는 옛저녁에 잊어버린 채 대검을 착검하고 직접 인간사냥을 하기 위해서 거리를 나섰다
5월 19일 오전 11시 30분, 동구청 앞 도로에서 머리가 길거나 어린 사람들은 검문조차 하지 않고 일단 군홧발로 짓밟고 몽둥이로 폭행했다
5월 20일부터 21일까지 계엄군은 광주역에서 전남대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을 막아서는 시위대에게 대검 사용해서 공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시위대에 참여한 '허봉'씨가 목숨을 잃었다
5월 22일에는 술에 골아떨어져 만취한 계엄군이 전교사 연병장에서 헬기에 내리는 연행자의 얼굴에 대검을 찔러넣어 살해했다
계엄군들의 살육이 도처 곳곳에 벌어지자 시위대들도 힘을 잃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 죽일 대상을 물색하던 계엄군들은 시위대가 해산해버리자 민간인들에게 타겟을 돌린 것이다
금난로 3가 미도장여관 1층에는 종업원 김영대(32), 김병렬(17), 손병섭(26), 박필호(21) 네명과 40대 투숙객 두명이 있었는데
계엄군은 '폭도들을 숨기고 있으니 당장 내놓으라' 며 이들 여섯명들을 군화로 구타하고 몽둥이로 머리를 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걸로 끝나지 않고 이들의 옷을 모두 벗겨(도주를 차단하기 위해) 조선대학교 체육관으로 끌고가 다시 구타하였다
밤이 깊어질수록 계엄군의 잔인성을 더 심해졌다. 19일 오후 5시 광주시 서구 월산동 32으 22 4통 1반에 사는 김안부(36)씨는 광주공원 근처 전남주조당 앞 공터에서
공수부대원들한테 맞아죽었다. 시체는 전남대병원 영안실에 안치됐고 부인인 김만복씨는 이 사실들을 다른 사람들에 전해 시민들은 사망자가 나왔다는걸 알게됐다
▲계엄군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화염방시기를 사용했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당시 계엄군들이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하여 시민들을 참살했다는 증언과 주장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윽고 (20일) 오후에는 대규모로 시위가 전개되었고 2시 30분경 서방삼거리에서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를 쏘아 여러 명의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타죽었다
- 오월의 사회괴학, 최정훈, 1999, 137쪽
급한 김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는데 문을 닫고 보니 4명이 거기에 같이 갇힌 꼴이 되었지요.
그런데 아뿔사! 공수부대 놈들이 기어코 우리를 쫓아와 화장실 창문에 화염방사기를 대고 불을 뿜어내지 않겠어요. 순간 숨이 꽉 막혀 문을 열고 뛰쳐나갔어요.
-최병옥 증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소방서 앞에는 꽤 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계엄군들은 화염방사기를 들고 시민들을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직접 사람들을 향해 쏘지는 않고 높은 각도로 쏘고 있었다. 시민들을 살상하기 위해서 쏘는 것이 아니라 위협용으로 쏘는 것 같았다.
나도 군대를 갔다 왔지만 말로만 들었지 총구에서 불이 뿜어나오는 화염방사기는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아무리 위협용이라 해도 무기 하나 들지 않은 시민들을 향해 살상용 무기인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는 것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너무나 잔인했다. 한편에서는 분노가, 또 한편에서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생겼다.
-최충용 증언,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광주 시내에 저공비행을 하며 민간인 살해를 시도하는 계엄군의 군용헬기
그리고 밝혀진 또 하나의 사실은 광주 항쟁 당시 계엄군이 헬기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계엄군은 철저하게 시위대를 살해할 목적으로 헬기부대에 지원사격을 요청하였고 헬기부대는 전남도청 일대를 저공비행하며 날아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헬기부대는 순찰과 군 지원 목적으로 탐색했을 뿐, 민간인을 상대로 공격하지 않았다고 부인했지만
조사 결과 실제 군용헬기가 동원되어 장갑차 등 중장비를 타격할 때 사용하는 20mm 기관포를 광주 전일빌딩 일대에 무차별 사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전일빌딩을 수 십년 전의 증거를 그대로 간직한 채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날 때까지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언론 취재 결과 그 당시 헬기 조종사가 무장을 적재한 채로 광주에서 활동했다는 증언도 받아냈다
올해는 5.18 민주화운동 46주년이다
출처 : https://bbs.ruliweb.com/best/board/300143/read/75221996?m=hu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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